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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군의 역사

현재의 금산군(錦山郡)이란 행정구역상의 명칭은 1914년 3월 1일부, 폐합으로 옛 금산군(錦山郡)과 진산군(珍山郡)을 병합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옛 금산군(錦山郡)은 백제시대에는 진내군(進乃郡)또는 진내을군(進乃乙郡)이라 했는데,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경덕왕때 진예군(進禮郡)이라 고치고 고려초에 진예현(進禮縣)으로 하였다가 1305년(고려 충렬왕때 31년)에 금주군(錦州郡)으로 승격시키고, 부리현(富利縣), 청거현(淸渠縣), 무풍현(茂豊縣), 진동현(珍同縣)의 5현을 소속시켜 지금주사(知錦州事)를 두어 다스리게 하였다.

 

(高麗史 57券) 1413년(조선 태종 13년) 이에 따라 금주군(錦州郡)을 금산군(錦山郡)으로 개칭하여 조선말까지 이르렀다.

 

옛 진산군(珍山郡)은 백제시대에는 진동현(珍同縣)이였는데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후 황산군(黃山郡) 의 속현(屬縣)으로 하였다.

 

고려초에 옥계부(玉溪府)로 고쳤다가 1305(고려 충열왕 31년) 금주군(錦州郡)에 소속시켰다.

 

그 후 1390년에 다시 고산현(高山縣)의 속현(屬縣)으로 한 것을 조선에 와서 1393년(태조2년) 에 만인산(萬刃山:胎峰)에 태조의 태(胎)를 모신후 진주군(珍州郡)으로 승격시키고 지진주사(知珍州事) 를 두어 다스리게 하였으며, 1413년(조선 태종 13년)에 이에 따라 진산군(珍山郡)으로 개칭하였다.

 

1896년 8월 4일 칙령 제36호 (則令 第36號)에 13도 실시에 따라 충청남도 공주부(忠淸湳道 公州府)의 금산군과 진산군을 전라북도로 편입되었다가 서두에 기술한바와같이 1914년 3월 1일 부, 폐합으로 진산군을 병합하여 현재의 금산군(錦山郡)이라 칭하고,금산면(錦山面),금성면(錦城面),제원면(濟源面) 부리면(富利面), 군북면(郡北面), 남일면(南一面), 남이면(南二面),진산면(珍山面),복수면(福壽面), 추부면(秋富面)의 10개면(面)으로 하였다가 1940년 11월 1일 부령 제221호(府令 第221號)에 금산면(錦山面)이 금산읍(錦山邑)으로 승격되어 1읍 9면으로 되었다.

 

그후 1963년 1월1일 서울특별시, 도, 군, 구의 관할구역 변경에 관한 법률(법률 제1172호)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전라북도에서 충청남도로 편입되어 현재에이르고 있다.

 

광복 이후 행정구역의 변동상황을 살펴보면은 1953년 12월에 군북면 의회(郡北面議會)의 의결에 의하여 내부리(內釜里)에 있는 군북면사무소(郡北面事務所)를 현재의 위치인 두두리(杜斗里)로 신축이전 하였으며, 1962년 5월 27년 군조례(郡條例)제28호에 따라 군북면 내부출장소 (郡北面內釜出張所)를 설치하였다.

 

1973년 7월 1일 대통령령(大統領令) 제 6542호에 따라 복수면 용지리 (福壽面 龍池里)가 추부면(秋富面)에 편입되었다.

 

그동안 인구의 증가와 말단 행정 수요의 증가로 행정리의 수는 꾸준히 증가하여 1960년에 156리 946반이었던 것이 1964년 163리, 1965년 166리 1967년 167리, 1968년 1005반으로 증가되고 1970년 169리 1015반, 1971년 174리 1016반, 1974년 203리 1078반, 1975년 212리 1092반, 1980년 231리 1093반, 1981년 1070반으로 축소되었다가 그 6년 후인 1987년에는 247리, 1988년에는 247리 1089반, 1996년에는 249리 1112, 2010년 253리, 2011년 254리, 2014년 255개리로 조정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금산인삼의 유래 : 강처사 전설

금산군 남이면 성곡리 개안이 마을은 인삼의 눈을 뜨게 한 곳이라는 뜻으로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해오고 있다.

 

지금부터 약1,500여년 전에 강씨 성을 가진 선비가 일찍이 부친을 여의고 모친마저 병들어 자리에 눕게 되었다.

 

효자인 아들은 진악산에 있는 관음굴에서 정성을 들여 모친의 병을 낫게 해달라고 빌고 또 빌었다.

그러던 어느날 꿈속에서 산신령이 나타나 ”관음불봉 암벽에 가면 빨간 열매 세 개가 달린 풀이 있을 것이니 그 뿌리를 달여 드려라. 그러면 네 소원이 이루어질 것이다.”하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강선비는 꿈이 하도 이상하여 꿈속에서 본 암벽을 찾아가니 과연 그런 풀이 있어 뿌리를 캐어 어머니께 달여드렸더니 모친의 병은 완쾌되었고, 그 씨앗을 남이면 성곡리 개안이 마을에 심어 재배하기 시작하니 이것이 우리 고장에서 처음으로 인삼을 인공적으로 재배하게 된 것이라고 하며, 인삼의 모양이 마치 사람의 모습과 비슷하다 하여 人蔘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한다.